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문단 편집) === 군국주의의 대두 === 러일전쟁을 치르고 열강대열에 오른 후 이때 생긴 채무도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전부 상환하고 흑자를 남기며 일본의 성장이 가시화되자 종전까지 일본을 밀어주던 서구 열강들이 일본을 점차 견제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세계대전의 되풀이를 막자는 취지 하에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도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하였다. 하지만 몇몆 제약이 있었어도 일본은 계속된 군비 확장을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점점 높아졌다. 이러자 가계가 위험해진 농민들은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쿄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 일명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이 둘은 다른 사건이지만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http://news.mk.co.kr/newsRead.php?no=688861&year=2008|본 기사]]를 참고하고 후자는 [[금해금]] 문서 참고.]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인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연이어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으며 일본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였다. 이런 상황에 군부가 정치에 관여하며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공공 건설, 일자리를 늘려 고용률을 높이는 [[뉴딜 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강대국들은 자국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만한 나라가 주변에 별로 없었을 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미약했다.[* 일본이 보유한 식민지들은 여타 유럽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과는 규모는 물론 성격 자체가 달랐다. 유럽의 식민지들은 공업 개발이 미약했던 반면 풍부한 원자재 공급처였기 때문에 원자재를 가져와 본국에서 제품을 생산한 뒤에 다시 되파는 돌려막기로 어느 정도 근근히 버텨나갈 수 있었지만 일본의 주요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요동]]은 정치/군사적 목적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돌려막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본국의 재정을 빨아먹어 손해만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선을 병합한 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 그해 1년 예산의 90% 이상이 경성(한양)의 상/하수도 기반시설 설치에 소요될 정도였다. 구한말 경성(한양)의 상/하수도의 열악함과 불결한 위생상태는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을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 분노하기 시작한 군부 내 급진층은 조금이라도 온건적 혹은 중도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총리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며 폭주하기 시작,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이 엮여 [[5.15 사건|두번에 ]] [[2.26 사건|걸친]] 쿠데타를 시도하게 된다. 1932년에 거국내각이 조직되면서 일본을 움직일 통합된 통치구조가 형성되었고 두 차례의 쿠데타 미수로 일본의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은 분쇄되고 [[기타 잇키]] 등이 처형되었으나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집권하여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대에 굴복하게 된 일본 제국 정계는 결국 [[중일전쟁]]으로 폭주, 일본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몰락의 시발점인 [[총력전]]을 선택하게 된다. 관련해서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조. 1931년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천황의 재가 없이 멋대로 일으킨 [[만주사변]]을 막지 않은 일본 제국은 고작 연대장에 불과한 [[무타구치 렌야]]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 전범 행위도 처벌하기는커녕 기회로 여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꼴도 묵인했고 결국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해 문민통제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나라가 군부에 먹히고 말았다. 이후 군부를 대표하는 [[도조 히데키]]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은 만주사변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전쟁준비를 위해 1934년 워싱턴 군축조약을 탈퇴하며 폭주 드라이브를 전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 해/공군 부문에서 일본에게 열세였던 중국 국민당군은 일본군에게 제해권, 제공권 둘 다 잃어버렸고 특히 제공권을 잃어버렸기에 국민당 육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일본군은 밀어붙이며 지속적인 확장 정책노선을 밟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복은커녕 [[충칭]]으로 정부를 옮겨 끝까지 항전한다. 한편 중일전쟁이 발발한지 꽤 된 시점에서, 충칭을 임시수도로 할 만큼 몰리자 미국은 최대시장이기도 한 [[국민정부|중화민국]]이 패망하여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중국을 지원하며 일본에게 [[철광석]] 수출을 제한한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일본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미국은 일본에게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내 모든 곳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이행을 하기 전까지 석유 등 군수물품에 쓰이는 주요 자원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 일본은 석유 수출의 90% 이상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원 옥죄기를 통한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막대한 돈과 인력을 들여 영토를 확장한 일본이 미국이 경제제재를 한다고 "예 바로 만주지역까지 후퇴하겠습니다." 라며 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석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석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에 있는 [[유전]]에 관심을 가졌는데, 문제는 이 지역으로 가려면 [[미국 통치기 필리핀|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통과해야 했다. 일본은 내부 회의 끝에 동남아 유전도 먹고 단기적으로 미국 태평양함대를 괴멸시켜 향후 미국과의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목표 하에 [[남방작전]]과 [[진주만 공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에게 연합함대 사령관장을 맡겼고 이소로쿠는 일단 맡게된 작전이니 일격필승을 다짐하며 일본계 미국인들 중 일본에 협조적인 이들을 포섭하여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모으면서 지형 미니어쳐까지 만들며 그 유명한 [[진주만 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군함들을 격침시켜 미 태평양함대에 일격을 먹이는 데에 성공했고 이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맞기 전까진 말 그대로 '''폭주'''했다. 그런데 일본은 모종의 이유로 [[선전포고]]문 전달이 늦어지는 바람에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건 야비하고 뻔뻔한 국가가 되어버렸다.[*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 전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를 주미일본대사관에 보냈지만 이 문서는 선전포고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문서였고, 그나마도 쓸데없이 너무 긴데다가 암호문이라서 주미일본대사관이 해독, 번역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미국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일, 참전 여론을 등에 업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한편 미국에 한방 먹인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남방작전]]을 개시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때쯤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유럽 열강은 [[프랑스]], [[네덜란드]]처럼 [[나치 독일]]에 잡아먹히거나 [[영국]]처럼 나치 독일에 항전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유럽 열강들은 동남아시아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배치된 장비도 [[M2 경전차#s-3.1|M2A4 경전차]], [[스튜어트 전차#s-4.1|M3 스튜어트]], [[마몬-헤링턴 MTLS|마몬-헤링턴]] [[마몬-헤링턴 CTMS|경전차들]], [[유니버설 캐리어]] 등이 주력 전차, 장갑차일 정도로 2선급 장비였기에 사실상 빈 집에 가까웠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주재 영국군의 삽질과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전략적인 전격전으로 영국령 동남아 식민지를 점령했으며, 이후 필리핀 주둔 미군도 패배하며 기세를 탄 일본 제국은 중국의 절반 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까지 휩쓸었다. 서구 열강들의 2선급 전력들을 상대로 이긴 일본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내친 김에 인도와 남태평양까지 쭉쭉 진출했다. 1942년, 일본 제국은 동북아에서 동남아, 남태평양까지 이르는 최대판도를 형성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시 뒤 [[귀축영미]]라는 단어가 유행했는데, [[귀신]]과 [[짐승]]같은 [[영국]]과 [[미국]]이라는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